高麗國 華山 曹溪宗 麟角寺 迦智山下 普覺國
尊碑銘幷序 宣授朝列太夫 遙授翰林直學
士 正獻太夫 蜜直司 左承旨 國學 太司成 文翰
侍講學士 充史 修撰官 知制誥 知判圖司事
世子右諭善太夫 賜紫金漁袋 臣閔漬 奉勅
撰 夫淸鏡濁金 元非二物 渾波湛
水 同出一源 基本同而末異者 在乎磨與不磨
動與不動耳 諸佛衆生 性亦如是 但以迷悟爲
別 孰云愚智有種 以至愚望大覺 勢絶 壤及
乎一廻機 便同本覺 自迦葉微笑 達磨西來 燈
相續 直至于金者 皆以此也 傳其心 得其髓
廻慧日於虞淵 曜神光於桑域者 惟我國尊有
焉 國尊諱見明 字晦然 後易名一然 俗姓金氏
慶州章山郡人也 考諱彦弼 不仕 以師故贈左
僕射 李氏 封樂浪郡夫人 初母夢日輪入屋
光射于腹者 凡三夜 因而有娠 泰和丙寅六月
辛酉誕焉 生而俊邁 儀表端嚴 豊準方口 牛行
虎視 小有出塵志 年甫九歲 往依海陽無量寺
始就學 而聰警絶倫 有時危坐盡夕 人異之 興
定己卯 就陳田長老大雄 剃度受具 於是遊歷
禪肆 聲價藉甚 時輩推爲九山四選之首 丁亥
冬 赴選佛場 登上科 厥後寄錫于包山寶幢
庵 心存禪觀 丙申秋有兵亂 師欲避地 因念文
殊五字呪 以期感應 忽於壁間 文殊現身曰 無
住北 居明年夏 復居是山妙文庵 之北 有亂若
曰無住 師乃悟前記 住是庵 時常以生界不減
佛界不增之語參究之 忽一日豁然有悟 謂人
曰 吾今日乃知三界如幻夢 見太地無纖豪
是年批授三重大師 丙午加禪師 己酉鄭相國
晏 捨南海私第 爲社曰定林 請師主之 己未加
太禪師 中統辛酉 承詔赴京 住禪月社 開堂
遙嗣牧牛和尙 至元年秋 累請南還 寓吾
魚社 未畿仁弘社主萬恢 讓師主席 學侶雲臻
戊辰夏 有朝旨 集禪敎名德一百員 設大藏
落成會於雲海寺 請師主盟 盡讀金文 夜談宗
趣 諸家所疑 師皆剖釋如流 精義入神 故無不
敬服 師主仁弘十一年 是社創構旣遠 殿宇皆
頹 又且 隘 師 重新恢廓之 仍奏于朝
改號仁興 宸書題額以賜之 又於包山東麓 重
葺湧泉寺爲佛日社上卽祚四年丁丑詔住雲
門寺大闡玄風上日深傾注以詩寄云密傳
何必更 衣金地逢招亦是奇欲乞璉公邀闕
下師何長戀白雲枝辛巳夏因東征駕幸東都
詔師赴行在及至 請陞座倍生崇敬因取師
佛日結社文題押入社明年秋遣近侍將作尹
金 詔迎至闕下請於大殿設禪喜溢
龍顔勅有司 于廣明寺入院日夜半有人
立方丈外曰善來者三視之無有也冬十二月
乘輿親訪咨門法要明年春上謂群臣曰我先
王皆得釋門德大者爲王師德又大者爲國師
在否德獨無可乎今雲門和尙道尊德盛人所
共仰豈宜寡人獨蒙慈澤當與一國共之於是
遣右承旨廉承益奉綸旨請行闔國尊師之禮
師上表固讓上復遣使牢請至三仍命上將軍
羅裕等冊爲國尊號圓徑沖照冊訖四月辛卯
迎入大內躬率百僚行 衣禮改國師爲國尊
者爲避大朝國師之號也師素不樂京輦又以
母老乞還舊山辭意甚切上重違其志而允
之命近侍佐郞黃守命護行下山寧親朝野嘆
其希有明年母卒年九十六是年朝庭以麟角
寺爲下安之地勅近侍金龍劒修葺之又納土
田百餘頃以賁常住師入麟角再闢九山門都
會叢林之盛近古未曾有也越己丑六月示疾
至七月七日手寫上太內書又命侍者作書寄
相國廉公告以長往因與諸禪老問答移晷是
夜有長星大尺圍隕于方丈後翌日之乙酉晨起
浴而坐謂衆曰今日吾當行矣不是重日耶
云不是曰然則可矣令僧過法鼓師至善法堂
前踞禪床封印寶命掌選別監金成固重封畢
謂曰適値天使來見老僧末後事有僧出問釋
尊示滅於鶴林和尙歸眞於麟嶺未審相去多
少師拈 杖卓一下云相去多少進云伊 則
今古應無墜分明在目前師又卓一下云分明
在目前進云三角麒麟入海中空餘片月波心
出師云他日歸來且與上人重弄一場又有僧
問和尙百年後所須何物師云只這箇進云重
與君王造箇無縫塔樣又且何妨師云甚 處
去來進云也須問過師云知是般事便休又有
僧問和尙在世如無世視身如無身何妨住世
轉大法輪師云隨處作佛事問答罷師云諸禪
德日報之痛痒底不痛痒底 糊未辨乃拈
杖卓一下云這箇是痛底又卓一下云這箇
是不痛底又卓一下云這箇是痛底是不痛底
試辨看便下座歸方丈又坐小禪床言笑自若
俄頃手結金剛印泊然示滅有五色光起方丈
後直如幢其端煜如炎火上有白雲如蓋指
天而去時秋暑方熾顔貌鮮白支體塋澤屈伸
如生遠近觀者如堵丁亥 維拾靈骨置于禪
室中門人 遺狀印寶乘傳以聞上震悼遣
判觀候署事令倜展飾終之禮又命按廉使監
護喪事仍降制諡曰普覺塔曰靜照十日辛
酉塔于寺之東崗享年八十四臘七十一師爲
人言無戱謔性無緣飾以眞情遇物處衆若獨
居尊若卑於學不由師訓自然通曉旣入道穩
實而縱之以無 辯至古人之機緣語句盤根
錯節渦旋波險處抉剔 鑒恢焉游刀有餘
又於禪悅之餘再閱藏經窮究諸家章 旁涉
儒書兼貫百家而隨方利物妙用縱橫凡五十
年間爲法道稱首隨所住處皆爭景慕唯以未
參堂下爲恥雖魁傑自負者但受遺芳餘潤則
莫不心醉而自失焉養母純孝慕睦州陳尊宿
之風自號睦庵年及 期聰明不小衰敎人不
倦非至德眞慈孰能如是乎初龍劒之來也馬
山驛吏夢人曰明日當有天使修曇無竭菩薩
住處行過此明日果至以師之行己利人觀之
是夢豈虛也哉其餘異跡奇夢頗多恐涉語恢
故略之師之所著有語錄二卷偈頌雜著三卷
其所編修有重編曺洞五位二卷祖派圖二卷
大藏須知錄三卷諸乘法數七卷祖庭事莞三
十卷選門拈頌事莞三十卷等百餘卷行于世
門人雲門寺住持大禪師淸 狀師之行聞于
上令臣撰辭臣學識荒淺不足以光揚至德
故過延數年請旣不已命亦難 謹爲之序而
銘之曰勝幡西振舌覆大千唯是法印
密付單傳竺乾列宿中夏五葉世隔人同光
相接曺溪一派東浸扶桑孕生智日我師克昌
去聖逾遠世道交喪不有至人群生安仰惟師
之出本爲利他學窮內外機應萬差曉了諸家
搜玄索妙剖釋衆疑如鏡斯照禪林虎嘯敎海
龍吟飇起雲合學侶 拔陷拯淪玄功盖代
五十年間被人推戴上將請益思共元冊爲
國尊中又尊寶藏當街慈航當渡窮子始歸
迷津爭赴長星忽墜法棟已 去來由己其去
何催眞空不空妙有非有絶跡離名然後可久
上命旣迫臣無以辭把龜毛筆書沒字碑劫
火洞燒山河皆燼此碑獨存斯文不 元貞元
年乙未八月日門人沙門竹虛奉勅集右
將軍王羲之書門人內願堂兼住持通奧眞靜
太禪師淸 立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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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로 해석한 보각국사 비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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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국(高麗國) 화산(華山) 조계종(曹溪宗) 인각사(麟角寺) 가지산하(迦智山下) 보각국존비(普覺國尊碑) 병서(幷序) 민지(閔漬)찬,고운기 옮김
저 맑은 거울과 둔탁한 쇠가 원래 두 물건이 아니요, 휘몰아치는 파도와 고요한 호수가 함께 한 근원에서 나오느니, 그 근본은 같으나 끝이 달라지는 것은 연마하고 연마하지 않거나 움직이고 움직이지 않는 데 있을 따름이다. 여러 부처와 중생의 성품 또한 이와 같으니 다만 미혹함과 깨달음으로 구별되는 것이다. 누가 일렀는가, 우둔함과 지혜로움에 종자가 있어 지극히 우둔함으로 큰 깨달음을 바라나니, 형세가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있다가도 한번 기틀을 잡아 돌아옴에 문득 본래의 깨달음과 같아진다. 가섭 부처님의 미소로부터 달마 스님이 서쪽에서 오고, 불법의 등불을 서로 이어 지금에 바로 이어지는 것은 모두 이와 같은 까닭이다. 그 마음을 전하고 그 정수를 얻어 해지는 곳에서 밝은 해를 돌리고 해 뜨는 곳에 신묘스러운 빛을 밝히기는 오직 우리 국존(國尊, 일연을 가리킴)이 있을 따름이다. 국존의 이름은 견명(見明)이고 자는 회원(晦然)이며 나중에 일연(一然)으로 고쳤다. 속성은 김씨이며 경주 장산군 사람이다. 아버지의 이름은 언필(彦弼)인데 벼슬을 살지는 않았으나, 스님 때문에 좌복야로 추증을 받았다. 어머니는 이씨이고 낙랑군부인으로 봉해졌다. 처음에 어머니가 둥근 해가 집안으로 들어와 배에 쏘이는 꿈을 꾸고, 무릇 3일 밤이나 계속되어 태기가 있더니, 태화 병인년(1206년) 6월 신유일(11일)에 태어났다. 나면서 준수하였으며 의표가 단정 풍만하고 굳은 입에 소걸음과 호랑이 눈을 가지고 있었다. 어려서 속세를 떠난 뜻을 품어 나이 겨우 아홉살에 해양 무량사에 가서 의탁하고 비로소 공부를 시작하였는데, 총명함이 뛰어났고 때로 받듯이 앉아 저녁시간을 다 보내니 사람들이 기이히 여겼다. 흥정 기묘년(1219년)에 진전사의 장로에게 나아가 머리를 깎고 구속계를 받았다. 여러 절을 두루 돌아다니는 동안 소문이 자자했으며, 그때의 무리가 추대하여 구산사선의 우두머리라 하였다. 정해년(1227년) 겨울에 선불장에 나아가 상상과로 합격하였다.
그 후 포산의 보당암에 주석하며 마음속 깊이 참선을 하였다. 병신년(1236년) 가을에 전쟁이 일어나자, 스님은 피신을 하고자 문수오자주를 염송하며 감응이 있기를 기다렸다. 그러자 벽 사이에서 문수보살이 나타나 무주의 북쪽이라 일러 주었다. 이듬해 여름 다시 이 산의 묘문암에 거처하였는데, 암자의 북쪽에 절이 있어 이름이 무주였다. 이에 스님은 지난날의 기억이 되살아나 이 암자에 거처하였다. 이때 스님은 “생계는 줄지 않고 불계는 늘지 않는다”는 말을 가지고 참선하였다. 하루는 활연한 깨우침이 있어 사람들에게 일러 가로되, “오늘에야 삼계가 꿈과 같음을 알았으며, 대지에 터럭 하나만한 장애도 없음을 보았다”고 하였다. 이해에 삼중대사로 임명이 되고 병오년(1246년)에 선사에 더해졌다. 기유년(1249년)에 상국 정안이 남해의 개인집을 내놓아 정림사라 하고 스님을 청해 주지로 삼았다. 기미년(1259년)에는 태선사로 더해졌으며, 중통 신유년에 임금의 부름을 받들어, 서울에 올라가 선월사에 주석하며 법당을 열고, 멀리 목우화상을 이었다.
지원 원년(1264년) 가을에 이르러 누차 남쪽으로 돌아갈 것을 청하여, 오어사에 우거하다가 얼마 안 있어 인흥사 주지 만회가 주석의 자리를 양보하여 갔는데, 배우려는 자가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무진년(1268년) 여름에는, 조정의 교지로 선종과 교종의 이름난 승려 백 명 이상을 모아 운해사에서 대장낙성회가 열리자, 스님이 주강사를 보았다. 낮으로는 불경을 읽고 밤으로는 교리의 핵심을 담론하였는데, 여러 전문가의 의심나는 바를 스님은 모두 해석을 해내되 마치 물 흐르는 것 같고, 깊이 파헤친 뜻이 신들린 경지여서 누구도 경탄하여 복종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스님은 인흥사에 주석한지 11년에, 이 절이 만들어진 지 오래되고 전각과 집이 낡았으며 또 좁다고 하여 새롭고 넓게 짓고자 했다. 그리하여 조정에 주청하자 임금은 인흥사라 이름을 고치고 현판을 내려주었다. 또 포산 동쪽 기슭에 용천사를 중창하여 불일사라 하였다. 충렬왕이 즉위한 4년인 정축년(1277년)에 운문사로 불러 주석케 하자 현풍을 드날렸다. 왕은 날이 갈수록 스님에게 관심을 기울여 시를 지어 부쳤다.
심오한 뜻을 전함에 어찌 옷을 걷을 필요가 있겠는가 좋은 땅에서 만나 부르매 또한 기이하도다 그대를 궐 아래 맞아들이고자 하나 스님은 어찌 흰 구름 나뭇가지에 길이 애태우는가
신사년(1281년) 여름 동정군(고려와 몽골의 일본원정군)을 따라 임금의 행차가 경주에 이르자 스님을 불러 행재소에 오게 하고, 이곳에 오자 자리를 높여주도록 하였으며, 높이고 경애하는 마음이 배로 생겨났다. 이로 인해 스님이 쓴 불일결사문을 찍어 절에 들였다. 이듬해 가을 시위장군 윤금군을 보내 궐 아래 맞아들이게 하고, 대전으로 청하여 설법을 하게 하자, 임금의 얼굴이 기쁨으로 가득 찼다. 관리에게 명하여 광명사에 들게 했는데, 이 절에 든 날 밤, 어떤 사람이 방장 밖에 서서 말하기를, “좋은 이가 오기를 세 번이지만 보는 사람이 없다”고 하였다. 겨울 12월에는 임금이 친히 방문하여 불법의 요체를 자문하였다. 이듬해 봄 임금은 여러 신하에게 말하였다. “우리 선황들이 높은 이를 왕사로 삼았으며, 더욱 높은 이는 국사로 삼았거니와, 덕이 없고서야 나 홀로 없겠느냐. 이제 운문화상(일연을 가리킴)은 도와 덕이 높고 성대하여 사람들이 모두 우러르는 바이다. 어찌 나만 홀로 자애로운 은택을 입겠는가. 마땅히 온 나라와 더불어 함께하여야 할 것이다.” 이에 우승지 염상익을 보내 국사로 모시는 절차를 갖추도록 하였다. 스님은 임금에게 굳이 사양하는 글을 올렸으나, 임금은 다시 사신을 보내 청하기를 세 번 하였다. 마침내 상장군 나유에게 명하여 국존을 책봉하고 호를 원경충조라 하였다. 책봉을 마치자 4월 신묘일에 대내로 맞아들이고, 친히 백관을 거느리고 구의례를 행하였다. 국사국존이라 고친 것은 중국이 쓰고 있으므로 이 호칭을 피하기 위함이다.
스님은 평소 서울 생활을 즐겨하지 않고, 또 어머니가 연로하다는 이유로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였다. 사양의 뜻이 매우 깊어 임금께서도 거듭 그 뜻을 거스르다가 결국 허락하였다. 근시좌랑 황수명에게 명하여 하산을 호위케 하니, 조야의 인사들이 희귀한 일이라 하여 탄복해 마지않았다. 이듬해 어머니가 돌아가시니 96세였다. 이해에 조정에서는 인각사를 하안지로 정해, 근시 김용검에게 명령하여 수리하게 하고, 또 토전 100여 경을 주어 꾸며서 상주케하였다. 스님은 인각사에서 두 번이나 구산문도회를 열었는데, 숲처럼 성황을 이룬 것이 일찍이 있지 않았던 일이다. 해를 넘긴 기축년(1289년) 6월에 병이 들었다. 7월7일 태내에 올리는 편지를 손수 쓰고, 또 시자에게 명하여 배 상국에게 보내는 편지를 작성하게 하여, 이제 세상을 떠날 것임을 알렸다. 이어 여러 스님과 해가 기울도록 분답을 하였다. 이날 밤 큰 별이, 둘레가 한 자 정도 되는데, 방장의 뒤쪽에 떨어졌다.
다음 날인 을유일 새벽에 일어나 세수를 하고 주위에 모여든 제자들과 문답을 나누었다. 일연은 “오늘 내가 떠나려 한다”고 말문을 연 다음 액일이 아닌가를 먼저 물었다. 7월8일이므로 괜찮다고 했다. 법고를 물리치라고 한 다음 스님은 선법당 앞에 이르러 선상에 앉아 인보를 봉하였다. 장선별감 김성고에게 거듭 봉하라 명한 다음 이름기를, “마침 선사가 와서 노승의 내일 일을 보는구나”고 하였다. 한 스님이 나서서 물었다. “부처님은 학림에서 멸적하시고 스님은 인각에서 참세계로 돌아가시니 서로 거리가 얼마인지요?” 스님은 지팡이로 법사를 한 번 내리친다. “서로 거리가 얼마인가?” 다시 나와서 말한다. “이와 같을진대 예와 오늘이 상응하여 실추함이 없이 분명히 목전에 있나이다.” 스님은 다시 법상을 내리치며 말한다. “분명히 목전에 있느니라.” 다시 나아와 말한다. “삼각의 기린이 바다 속으로 들어가더니 부질없이 남은 조각달이 물결 가운데에서 나오나이다.” 스님은 말하였다. “뒷날에 돌아오면 다시 여러분과 더불어 거듭 한바탕 흥겹게 놀겠소.” 다른 승려가 물었다. “스님은 백 년 후로 돌아가시면 모름지기 소용되실 물건이 무엇입니까?” 스님이 대답하였다. “다만 저것이다.” 나아와 말한다. “거듭 군왕과 무봉탑을 조성함에 어떤 방해가 있겠습니까?” 스님이 말하였다. “어떤 곳을 오고 가리오.” 다시 나서서 이르기를 “모름지기 허물을 묻습니다”고 하자 스님이 말하였다. “이 같은 일을 알게 되면 곧 끝나고 말리라.” 또 한 승려가 물었다. “스님께서 세상에 계시되 없는 듯이 하시며, 육신을 보시기를 육신 없는 듯하시니, 세상에 계시면서 대법륜을 굴리심이 무슨 거리낌이 있습니까?” 스님이 말한다. “처소에 따라 불사를 이루리라.” 문답이 끝난 다음 일연은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남긴다. “여러 선덕은 날마다 이것에 답하시오. 심하게 아프고 가려운 것과, 아프지도 않고 가렵지도 않은 것이 모호하여 가릴 수 없으리라.” 이에 지팡이를 다시 한 번 내리치고, “이것은 심하지 않은 것이오.” 하고, 또다시 한 번 지팡이를 내리친다. “이것은 바로 심한 것이며” 또다시 한번 법상을 내리치고, “이것은 심하지 않은 것이오”하고, 또다시 한 번 법상을 내리치고는 말하였다. “이것은 심한 것이면서 심하지 않은 것이니 가려보아야 할 것이요.” 문득 자리에서 내려가 방으로 들어가 다시 작은 선상에 앉았다. 지긋이 미소를 띠며 조금 있다 수결을 해보이더니 조용히 멸적하였다.
그때 오색의 빛이 방 뒤로 일어서는데 곧기가 마치 그 끝을 매달아놓은 듯하고 빛나기가 불타는 빛 같았다. 그리고 위로는 흰구름이 마치 지붕처럼 덮였다. 하늘을 가리키며 가는데, 때는 가을더위가 심하였지만, 얼굴 모습은 선명하고 의며 몸에는 밝은 윤기가 흘러, 굴신함이 마치 살아 있는 것 같아, 원근에서 바라보는 자가 담처럼 둘러섰다.
정해일에 영골을 추려 선실 가운데 안치하였다. 문인들이 유언장과 인보를 가지고 전하니 왕은 매우 슬퍼하며 사람을 보내 후히 장례 지내게 하였다. 또 안렴사에게 명하여 호상의 일을 보게 하고, 시호는 보각이라 하였으며 탑을 정조라 하였다. 10월 신유일에 인각사의 동쪽 언덕에 탑을 세웠다. 향년 84세, 승려로서 나이는 71세였다.
스님은 사람됨이 말에 농담이 없고 성품을 꾸미지 않았으며 진정으로 사물을 대하였다. 무리 가운데 있으면서도 홀로 있는 듯하고, 존귀함과 비천함을 같이 생각하였다. 배움에 스승의 훈육을 통하지 않고 자연히 통하여 깨달았다. 이미 도에 들어 알차게 훑어 나가되 거침이 없어 분별해 내었고, 옛사람이 말한 중요한 구절에 이르러, 뿌리가 서리고 마디가 어긋지며 소용돌이치고 물결이 험한 곳이라도 분명히 갈라주었으니, 넓디넓은 모습이여, 거기서 헤엄치고 칼로 자르며 남음이 있도다. 또 불도를 닦는 여가에 대장경을 열람하고 여러 전문가의 주석을 깊이 연구하였으며, 곁으로 유가의 책을 섭렵하고 겸하여 백가를 꿰뚫어, 처방에 따라 사물을 이롭게 하고 신묘로운 쓰임이 종횡하였다. 무릇 50년간 법도의 우두머리로 칭송되어 스님이 머무르는 곳마다 사람들은 다투어 경모하면서 오직 그 문하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였다. 비록 매우 뛰어나다고 자부하는 자라도 다만 남겨진 향기와 윤기를 받기만 하여도 마음으로 취하여 스스로를 잃어버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
어머니를 모시기가 지극히 효성스러워, 목주 진존숙의 유풍을 사모하여, 스스로 목암이라고 호를 붙일 정도였다. 나이가 매우 연만하여서도 총명함이 쇠해지지 않았으며, 사람을 가르치기를 권태로워하지 않았으니, 지극한 덕과 진정한 자애가 아니면 누가 이와 같이 하겠는가.
처음에 용검이 올 때였다. 마산역의 관리가 꿈을 꾸는데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내일 마땅히 천사가 나와 수담무갈보살이 머무는 곳에서 가다가 여기를 지나리라”고 하였다. 다음 날 과연 스님의 행렬이 이르렀는데 사람들을 이롭게 하니, 이 꿈이 어찌 허탄한 것이겠는가. 그 나머지 이적과 기이한 꿈이 자못 많으나 말이 괴이한 곳으로 흐를까 두려워 줄이기로 한다. 스님의 저서에는 [어록]2권과 [게송잡저]3권이 있으며, 편수한 책으로는 [중편조동오위]2권, [대장수지록]3권 그리고 [선문염송사원]30권 등 100여권이 세상에 나와 있다. 문인인 운문사 주지 대선사 청진이 스님의 행적을 적어 왕에게 아뢰니 왕이 찬술토록 하였는데, 나는 학식이 거칠고 얕아 지극한 덕을 떨치기에 부족한 까닭에 몇 년을 미루고 있다가, 요청은 그만둘수 없고 명령은 거스를 수 없어, 삼가 이 서문을 쓰고 명을 짓노라
원정 원년 을미년(1295년) 8월 일 문인 사문 죽허가 칙명을 받아 진나라 우군 왕희지 글씨를 모으고, 문인 내원당 겸 주지 통오진정태선사 청진이 비석을 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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