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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삿갓 (김병연)의 과거시험 사연

一正 2010. 9. 24. 10:59

김삿갓

(김병연)

[2010-09-24]

 
 
김삿갓(金笠, 1806-1863)은 조선 후기의 방랑 시인으로 본명은 김병연(金炳淵), 자는 성심((性深), 호는 난고(蘭皐)이다. 순조 7년 경기도 양주에서 태어났으나 가족의 생활근거지는 강원도 영월이었고 오랜 방랑생활 끝에 철종 14년 전라도 동복(同福)현에서 죽었다. 김병연의 가문은 당시 조선 왕조에서 실권을 잡고 있던 세도 가문인 신 안동김씨 문중이었으나, 김병연이 5살 때에 선천부사로 있던 할아버지 김익순이 홍경래의 난(1811년)을 맞아 항복한 결과 할아버지는 참수되고 가족은 폐족되는 수난을 당하게 된다.


사건이후 멸족은 되지 않아 목숨은 건졌으나 폐족의 고단한 삶을 살게 되었는데 부친이 화병으로 사망한 뒤 어머니가 형제를 이끌고 강원도 영월의 오지로 옮겨 세상과 담을 쌓고 살게 된다. 김병연의 어머니는 여러 가지를 고려하여 자식들에게 공부를 시키지 않으려 했지만 김병연은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불릴 만큼 재주가 뛰어 나서 공부를 하게 되었다. 김병연이 20살 되던 해에 영월 동헌 뜰에서 있던 향시에 참여하여 장원을 하게 되는데, 이 날의 시제(詩題)가 '논정가산 충절사 탄김익순죄 통우천' (論鄭嘉山 忠節死 嘆金益淳罪 通于天, 가산군수 정시의 충절된 죽음을 논하고 하늘에 사무친 김익순의 죄를 탄하라) 이었다.

 

과거시험에서 장원한 김병연의 집안은 잠시 동안 기쁨에 젖었으나 시제와 논한 내용을 들은 김병연의 어머니는 그 동안 숨겨왔던 가족의 비밀을 말하고 김병연은 자기가 신날하게 비판한 김익순이 바로 자기 할아버지임을 알게 된다. 이 일로 인해 김병연은 죽장에 삿갓 쓰고 세상을 떠돌게 되는 운명을 맞았지만 김병연이 논한 글은 명문장으로 후에 과거를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답안을 작성하는 모범과 지침이 되었으며 김병연 자신은 천재적인 방랑시인으로 역사에 길이 이름을 남기게 된다.


김병연은 결혼하여 학균, 익균 두 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학균은 병약한 형 김병하에게 양자 보내고 익균이 대를 잇게 된다. 김병연은 사건이후 처음에는 한양에 가서 벼슬길을 찾으려 노력하였으나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된다. 고향에 돌아와서 잠시 훈장을 하였으나 적응하지 못하고 방랑의 길을 떠나게 된다. 김삿갓의 방랑은 22세에 시작하여 57세 까지 35년간 계속되었다. 20대에는 주로 금강산주변, 30대에는 평안도 지역, 40대에는 충청 경상지역, 50대에는 전남 화순 지역을 무대로 방랑생활을 하다가 화순군 동복면에서 57세를 일기로 고단한 삶을 마무리 하게 된다. 그의 시신은 일 년 뒤 아들 익균에 의해 현재의 묘소로 이장되었다. 방랑 중에 아버지를 찾아 나선 아들 익균과 두어 차례 만난일이 있지만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았고 죽어서 고향으로 돌아간 셈이다. 

김삿갓은 당시 상황에서 비교적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던 서당, 사찰, 부잣집 등에서 숙식을 해결하려고 하였으나 이들은 대체로 반가이 맞이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서당 훈장이나 스님, 선비들을 비판하는 풍자시를 많이 남기게 된다. 그리고 오가다 만난 기생과의 야하고 애틋한 애정시도 많으며 순수 문학적인 시들도 남겼다. 그가 지은 시는 대략 1,000여 수 정도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현재까지 발굴된 시는 456수이다.


강원도에서는 김삿갓이 살던 강원도 영월군 하동면을 1999년 김삿갓면으로 면 이름을 변경하였고 김삿갓이 살던 집과 묘소 주변을 관광지로 개발하는 등 김삿갓의 관광자원화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주변에는 김삿갓 문학관을 비롯한 관광 부대시설이 즐비한데 간판이름은 김삿갓으로 도배되어 있다. 김삿갓의 삶이 이렇게 성공적인 평가를 받고 후세에 길이 남게 되리라는 것은 당시에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역사와 운명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김병연 개인에게 당시의 역사적 현실과 운명은 몹시 가혹하였지만 그로인해 발생된 그의 방랑생활은 우리의 대표적인 문화 스토리가 되었으며 그가 남긴 재밌고 기발한 시는 우리의 중요한 문학적 자산이 되었다. 김삿갓은 미래 트랜드인 하이컨셉, 하이터치의 대표적 사례이며 당시부터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동경의 대상이요 대리만족의 주인공이다. 누구나 복잡한 현실을 훌훌 털고 떠나고 싶고 압박하는 권위에 도전하고 싶기 때문이다. 김삿갓은 진정 풍자의 귀재요, 저항의 예술가이며 문화영웅이라 할 수 있다.